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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이씨 역사 > 역대중요인물 > 이갑성


1886(고종 23)∼1981. 독립운동가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연당(硏堂). 대구 출신.

1915년 세브란스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최연소자로 청년층을 대표하여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민족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세브란스의학 전문학교를 비롯한 각급학교의 학생중심의 시위운동을 주도하고 태화관(泰和館)을 중심으로 한 민족대표의 서명운동과 전단살포의 중책을 맡아 활약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옥고를 치렀다.

1924년 세브란스의약(醫藥)의 지배인으로 활동하고, 1926년 YMCA의 이사가 되어 항일청년운동을 지도하였다. 1931년 경성공업(京城工業)의 지배인을 역임하고 같은 해 신간회사건(新幹會事件)으로 상해(上海)로 망명,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그 뒤 귀국하여 1940년 흥업구락부사건에 가담하였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을 맞아 바로 독립촉성국민회(獨立促成國民會)를 결성, 회장으로서 활약하였다.

1947년 김규식(金奎植) 등과 협력, 과도입법의원의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제2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52년 국민회(國民會)의 최고위원에 추대되었다. 1953년 이범석(李範奭)의 족청계가 양우정(梁又正)을 통하여 국민회 파괴공작을 시도하였을 때 이에 저항하여 자유당의 최고위원이 되었고, 족청계가 숙청된 뒤 상처투성이가 된 자유당을 재건하기 위한 8인재건위원이 되어 정무부장(政務部長)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33인유족회장·국산부흥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자유당 말기에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조용한 생활을 하였고, 1963년 민주공화당의 창당 때에는 그 발기위원이 되었다. 1965년 광복회장에 취임하여 독립유공자들의 복지증진을 위해 노력했고, 같은 해 이준열사 기념사업회(李儁烈士記念事業會) 총재로 활약하는 한편, 삼일동지회(三一同志會) 고문으로도 활동하였다.

80세 이후에는 민족대표 33인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또한 3·1운동의 기념비적 인물로서 해마다 거행되는 3·1기념행사를 지켜보다가 여생을 마쳤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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