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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이씨 역사 > 시조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


<시조 알평공을 모시는 사당인 표암재>

알평(謁平), 본관(本貫)은 경주(慶州), 자(字)는 천서(天瑞), 호(號)는 표암(瓢巖), 시호(諡號)는 문선공(文宣公), 은열왕(恩烈王)에 추대됨.

『삼국유사』에 의하면 기원전 117년, 경주 이씨의 시조인 알평공(謁平公)이 하늘에서 신라의 4영산(靈山)의 하나인 경주 서북에 있는 금강산(金剛山)의 표암봉(瓢巖逢)에 내려와, 신라(新羅)건국의 모체(母體)인 사로(斯盧)의 6부 중 알천 양산촌(謁川 陽山寸)을 다스리며 혁거세를 양육시켰고 신라 초대 왕으로 추대하시는 6부 촌장의 의장으로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화백회의제도를 시행하셔서 오늘날의 민주주의 제도를 구현 시키신 선구자였음을 호언할 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 32년(신라 유리왕 9년) 유리왕이 진한 6촌을 6부로 개칭할 때 지금의 경주시 일원에 해당되는 양산촌을 급량부라 부르고 성씨를 이씨(李氏)라고 사성하였으니 경주라는 지명을 붙여서 경주 이씨(慶州 李氏)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

경주이씨의 옛 족보에 시조의 휘는 알평이며 진한의 표암봉 아래 처음 내려왔다고 하였다. 처음 내려왔다 함은 탄생을 말한 것이다. 신인이 태백산 박달나무 아래 내려 단군이 되었다느니 또 혁거세가 나정의 알에서 나오고 시조께서 이를 길러서 좌명공신이 되었다는 등등의 설을 의심해야 할지 믿어야 할지 결정하기 어려우나 오직 표암 일구(一區)가 급량대인(及梁大人)의 유허로 우리 이씨의 근본지가 되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시조 이래 덕을 쌓아 경사가 후손에게 내려 신라와 고려까지의 사이에 훌륭하고 큰 인물이 이어지고 대대로 벼슬을 하였다. 조선조에 이르러서 나뭇가지처럼 뻗고 물줄기처럼 나뉘어 자손이 번창하여 공도 되고 경도 되어 대대로 아름다운 업적을 이루어 우리 동방에 큰 집안으로 빛났던 것이니 이는 오직 급량대인의 음덕에 의한 것이다.

금오산 어느 기슭이 우리 시조의 묘소인가? 연대가 오래고 문헌의 고징이 없어 실전손 집성이 영양군수로 있을 때 이곳 표암바위에 [瓢巖(표암)] 두 글자를 깊이 새겼으나 모든 후손들이 이것으로는 유적을 표양할 수가 없다고 하여 돌을 다듬어 큰 비석을 세우려고 하자 일가 효신이 찾아와 경일에게 비문을 지으라 하였다. 내가 이 일은 많은 사람에게 상의하지 않아 갑을의 논의가 있을 것이나 그 근본을 잊지 않으려는 뜻은 또한 한 가지로 같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세운 후에도 영세토록 보호하여 아이들이 두드리고 짐승이 떠받지 않게 함은 경주에 사는 모든 종인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이에 비문을 짓는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원임좌의정 오은군 경일 찬
정헌대부형조판서 경연 춘추과 오위군총부총관 집두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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