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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이씨 역사 > 역대중요인물 > 이시영


1869(고종 6)∼1953. 독립운동가·정치가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야 차(此)를 통치함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귀천과 빈부의 계급이 무(無)하고 일체 평등임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신교·언론·저작·출판·결사·집회·신서(信書)·주소·이전·신체와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자격이 유한 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유함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와 병역의 의무가 유함(하략)
- 선생이 조소앙 등과 기초한 10개조의 <대한민국임시헌장> 중에서

이항복 10대손. 스물 두 살에 문과 급제
을사조약 체결되자 관직 사직, 외부대신과 절교

이시영 (李始榮, 1869. 12. 3~1953. 4. 17) 선생은 경주 이씨로 서울 저동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자는 성옹(聖翁)이요, 호는 성재(省齋) 혹은 시림산인(始林山人)이었다. 선생은 명재상으로 이름 높았던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이니, 서울에서도 대표적인 명가 출신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게다가 부친은 우찬성·이조판서 유승(裕承)이며, 어머니는 동래 정씨(東萊鄭氏)로 이조판서 순조(順朝)의 딸이었으니 당대에도 명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다.건영(健榮)·석영(石榮)·철영(哲榮)·회영(會榮)·시영·소영(韶榮)·호영(頀榮) 등 7형제 가운데 다섯 째로 태어난 선생은 첫 부인으로 영의정 김홍집(金弘集)의 딸을 맞았으나 사별하고, 반남 박씨를 둘째 부인으로 맞았다. 선생은 일찍부터 관직생활을 시작하였고, 소용돌이치는 한말 정국 속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만 16세 되던 1885년(고종 22)에 진사가 되고 동몽교관에 임명된 뒤, 18세에 형조좌랑를 역임하였다.

만 22세 되던 1891년에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로는 홍문관교리·승정원부승지·궁내부수석참의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즉 10대 후반부터 20대 전반 사이에 주로 궁궐 안의 중요한 직책을 맡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1895년 관직을 물러나 10년 동안 자신을 가꾸었다. 중형 회영(會榮)을 비롯하여 이상설(李相卨)과 같은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근대학문의 탐구에 몰두한 것이다. 선생이 다시 관직에 나선 시기는 1905년, 즉 관직을 물러난 지 10년 지난 시기였다. 이번에는 외부(外部) 교섭국장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선생이 자리를 맡자마자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러일전쟁이 끝나면서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라는 것이 강요되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이것을 막아내야 한다고 작정하고,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일제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도록 강하게 요구하였다. 그렇지만 박제순은 을사조약을 받아들였다. 이에 비감해진 선생은 교섭국장직을 사직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생의 집안은 박제순 집안과 절교를 선언하였다. 당시 선생의 조카와 박제순의 딸이 약혼한 상황이었는데, 을사조약 체결에 박제순이 동의하자 선생은 즉각 혼약을 파기하고 절교해 버린 것이다. 선생이 외부 교섭국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약 강제체결을 막지 못함에 따른 충격은 매우 컸을 것이다.

한일합병 후 선생 형제 가족 50여명 가진 재산 처분…
독립군 기지 건설 위해 만주로 모두 망명

선생은 그 다음 해에 다시 관직에 발탁되었다. 만 37세이던 1906년에 평안남도 관찰사에 등용된 것이다. 당시 평안남도가 얼마나 중시되던 지역이었는지를 고려한다면 선생에 대한 고종황제의 신망은 대단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지에 부임한 선생은 근대학교 설립 및 구국계몽운동 확산에 힘을 쏟았다. 그러다가 다음 해인 1907년에 중추원 칙임의관(勅任議官)이 되어 상경하고, 1908년에는 한성재판소장·법부 민사국장·고등법원판사 등 법부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이 모두 만 40세가 되기 이전에 선생이 맡았던 관직들이었으니, 선생의 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이 관직생활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07년 형인 이회영을 비롯하여 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동녕(李東寧) 등이 신민회를 비밀리에 조직하고 국권회복운동에 나섰을 때, 선생은 관직생활을 하면서도 이에 참가하였다. 이 사실은 나라를 잃자마자 해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에 동참한 것이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신민회 지도자들은 계몽운동만으로 독립을 찾을 수 없다는 현실을 바로 인식하면서, 계몽운동에 의병항쟁의 방략을 도입하였다. 1900년대에 의병항쟁을 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방략이라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계몽운동가들 가운데, 신민회 그룹은 무장항쟁의 방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의병처럼 준비되지 않은 전투가 아니라,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밀고 나가기 위한 군사력 양성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틀을 잡아 나갔다. 이를 위해서는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전략이라고 판단한 신민회는 일제 강점에 들기 전부터 만주지역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를 잃자마자 만주로 망명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여기에서 망명이란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하고 떠난 길이다. 눈 질끈 감고 일제에 적당하게 타협하고 살면 조상 대대로 누려온 권리와 명예를 고스란히 누릴 수도 있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두 포기하고 떠난다는 말이다. 가는 길이 험할 뿐만 아니라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는 길이었다. 그러므로 사실상 대가족이 모두 망명길에 오른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명문거족이나 권문세가 출신으로 다수가 망명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회영과 선생 형제 일가 50여명이 만주로 망명한 사실에 대해 박은식은 ‘명문거족 가운데 유일한 경우’라고 평가하였다.

전재산 처분한 돈, 민족교육기관과 독립군 양성기관에 쏟아 부어
훗날 청산리대첩의 밑거름…

선생은 형제들과 더불어 가재(家財)를 처분하여 재원을 마련하고, 1910년 말 서간도(西間島)로 출발하였다. 그들이 정착한 곳은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柳河縣 三源堡 鄒家街)였다. 일행이 도착한 직후인 1911년 4월에 그곳 대고산(大孤山)에서 노천군중대회를 개최하여 교육진흥 및 독립군양성을 표방한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였다. 전자는 동포사회의 자치기관이요, 후자는 인력양성기관이었다.

독립전쟁을 일으키자면 군대가 필요하고, 또 그것을 조직하고 운영하자면 인력과 재력이 필요했다. 우선 동포사회를 구성하여 인적 자원을 확보하고, 근거지를 마련하여 정착지를 갖춰야 했다. 경학사의 결성은 곧 동포사회의 형성과 운영을 이끌어 가는 데, 또 신흥강습소는 인력, 특히 군사력을 양성하는 데 목표를 둔 기관이었다. 경학사의 기능은 부민단과 한족회로 계승·발전되어 갔고, 신흥강습소는 신흥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로 발전되어 가면서 독립군기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이 당시 경학사 초대사장에는 이상룡(李相龍)이, 신흥강습소 초대교장에는 이동녕이 추대되었지만, 이시영 형제들도 모두 여기에 참가하면서 국내에서 마련해 간 재원을 쏟아 부었다. 이들의 활동에는 머지 않은 장래에 러일전쟁이나 중일전쟁이 일어나리라는 예상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선생도 참가한 독립군기지 건설이 허망한 사업이 아니었음이 증명되었다. 바로 1920년의 청산리대첩이 그를 확인시켜준다. 그 날의 승리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누리던 온갖 특권을 버리고 죽음을 무릅쓰고 망명길에 올랐던 이유와 그곳에서의 노력이 하나의 결실로 나타난 것이 청산리 승전이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망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원세개(袁世凱)에 주목하기도 했다. 선생은 1913년 9월에 북경으로 갔다. 국내에서 이미 잘 알고 있던 원세개를 이용하여 한·중연합전선을 결성해 보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북경행이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원세개가 사망하는 바람에 중단되고 말았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던 그 무렵에 선생이 자리잡은 남만주 서간도 지역에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1919년 2월 1일자로 발표된 이 선언에는 남만주 일대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활동하던 주역들이 서명하였는데, 선생도 이상룡·이동녕·김동삼 등과 여기에 참가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한성정부를 비롯하여 국내외 곳곳에서 수립 선포된 정부마다 선생을 법무총장이나 재무총장 등 중요한 각료의 한 사람으로 기록했던 이유가 모두 이러한 활동 때문이었다.


<임시정부 개조안>(독립신문 1919.9.2) 8월 28일 의정원에 제출된 임시헌법 및 임시정부 개조안에 대한 기사
총리제를 통령제로 바꾸어 국무총리인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며 총리와 총장 등을 선임하였는데 이시영 선생(붉은 칸 내)은 재무총장으로 선임한다는 내용

임시정부 세워진 후 법무총장 재무총장 맡아…
가난과 시련 속의 임정 지키는 마지막 보루 역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독립운동에도 변화가 예상되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가 닥치고 이와 함께 독립의 기회가 나타나리라는 기대감에 독립운동가들도 정세변화에 온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선생은 바로 그 시기에 북경에 가 있었고, 따라서 3·1운동 소식을 들은 곳도 바로 북경이었다. 선생이 당시 북경에 머물렀던 이유는 고종 황제를 망명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정세변화에 맞는 돌파구를 마련하려던 활동의 하나였다. 그러다가 선생은 고종의 사망과 3·1운동 소식을 듣게 되었다.

거족적인 항쟁 소식을 듣자마자 선생은 당시 북경에서 활약하고 있던 이회영과 이동녕 및 이광과 함께 상해로 갔고, 그곳에서 4월 10일에 열린 회의에 참가하였다. 29명의 독립운동 최고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다음 날 아침까지 열린 이 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이 결정되었으니, 결국 선생도 제헌회의에 참가한 셈이 되었다. 이후에도 선생은 2회(4월 22-23일)와 3회(4월 25일) 의정원 회의에 참가하였다. 4월 13일에 임시정부의 수립이 선포되고, 다음 날 위원제가 실시되면서 선생은 법무총장을 맡았고, 당시 법무위원으로는 남형우·김웅선·한기악이 임명되었다. 선생이 법무총장을 맡은 시기는 5월 10일까지 짧은 기간이었고, 9월 15일부터는 재무총장을 맡아 임시정부의 자금 관리를 도맡았다. 특히 이 시기에 대다수 총장들이 아직 상해로 부임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선생이 담당한 역할과 위상은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안창호가 임시정부에 도착한 5월 이후 일단 임시정부는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체제를 갖추어 갔다. 그러나 1920년 중반을 넘어서면서 임시정부는 서서히 활력을 잃어갔다. 베르사이유 체제가 형성되면서 독립의 기회가 멀어져 갔고, 국내와 임시정부를 연결하던 연통부와 교통국이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위기에서 선생은 임시정부를 지켜내는 데 매달렸다. 여기에 두 가지 사례가 있다. 하나는 이승만 임시대통령의 상해방문 직후의 공황기를 버텨내는 데 기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독립전쟁 준비방략을 추진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에 참가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1920년 후반에 들면서 침체기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12월에 이승만 임시대통령이 상해에 도착하였지만, 문제가 해결되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불거져 갔다. 그러다가 1921년 5월에 이승만이 상해를 떠나 버린 뒤, 임시정부를 지켜나간 인물은 신규식과 이동녕 및 선생이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국제전이 일어날 때까지, 즉 독립의 기회가 올 때까지 확실하게 전쟁을 준비하자는 노력이 1922년 10월 한국노병회 결성으로 나타났는데, 선생도 여기에 참가하여 통상회원으로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이후 임시정부에서 선생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1930년 1월 25일에 상해에서 결성된 한국독립당이다. 1926년부터 민족유일당 운동이 전개되다가 1929년 말에 좌파의 이탈로 좌우합작운동은 일단 중단되었다. 더구나 좌파가 유호한국독립운동자동맹을 결성하자, 임시정부를 유지하던 우파 인물들이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나섰는데, 선생은 28명의 발기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이어서 이봉창·윤봉길 의거 등 한인애국단의 항쟁이 줄을 잇는 무렵에는 미리 항주로 이동하여 임시정부 요인들의 피신처를 준비하는 역할을 맡았다.


김갑수·이시영 선생 등의 사진
중국 상해에서 활동하던 김갑수·이시영·김인전·여운형 등이 함께 찍은 사진으로 맨 오른쪽이 이시영 선생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에 참여하여
정부를 전시체제로 바꿔 나가

1932년 4월 29일에 윤봉길 의거가 있은 직후에 임시정부는 일제의 추격을 피해 항주로 이동하였다. 임시정부 최고의 시련기를 보내던 항주에서 선생은 한국독립당의 13명 이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 또 1933년에는 선생이 임시정부의 국무위원(법무장)으로 활약한 모습이 확인된다. 즉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요, 그 정부의 유일여당인 한국독립당의 이사를 맡아 항주와 가흥 일대에서 김구와 더불어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1935년에는 다시 좌우합작운동이 대두되고, 김원봉을 중심으로 조선민족혁명당이 결성되면서 임시정부는 해체 위기에 처해졌다. 그 위기를 지켜내기 위해 임시정부 지원정당으로서 남경에서 한국국민당이 결성되었는데, 선생은 김구와 함께 주역이 되고, 조성환·양우조와 함께 감사를 맡았다. 이어서 그 해 11월에는 새로운 내각이 결성될 때, 선생은 법무장에 선임되었다. 참고로 당시 내각진용을 보면, 이동녕(주석)·조완구(내무장)·김구(외무장)·송병조(재무장)·이시영(법무장)·조성환(군무장)·차리석(비서장) 등이었다. 따라서 임시정부의 법무장이요, 그의 여당인 한국국민당의 감사로 활동했다는 말이다. 이후 임시정부가 진강에서 장사·광주·유주·기강을 거쳐 중경에 도착할 때까지 선생은 임시정부의 법무장으로서, 그리고 임시의정원에서 경기도 출신 의원으로서 활약하면서 정부를 전시체제로 바꾸어 나가는 데 힘을 쏟았다.


가흥 시절의 임시정부 요인 사진.(1935년 추정)
김구를 중심으로 송병조, 이시영, 엄항섭, 조완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사진으로 아랫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이시영 선생

“중국 지도자들이여, 일제의 비열함을 직시하라.”
≪감시만어(感時漫語)≫ 직접 써서 발간

1934년에 선생이 ≪감시만어(感時漫語)≫라는 사론을 편찬한 일이 있다. 한국사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강조한 이 책은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항주로 피신한 시절인 1934년 3월 1일에 그곳에서 발간되었다. ‘절강성(浙江省) 어귀’에서 썼다고 밝혔으니 선생이 활동하던 항주에서 쓴 것이 거의 분명하다. 이 책을 쓴 동기는 선생이 1933년 여름에 우연히 중국인 황염배(黃炎培)가 쓴 ≪조선(朝鮮)≫이란 책을 읽게 된 데 있었다. 선생은 서언에서 “황염배의 글이 문체나 거친 말투나 허황된 표현이 많고, 마치 그가 일본인을 대신하여 일본을 선양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고 지적하면서, “군자의 의리로써 그의 실책을 힐책하고 나서 나의 관견(管見)을 덧붙일까 한다”라고 저술의 동기를 밝혔다.

≪감시만어(感時漫語)≫는 모두 23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다. 서언에서 황염배의 사관을 비판한 뒤 본론으로 21개의 장을 두고, 마지막 장을 결론으로 삼았다. 주요 구성내용은 단군과 요(堯)가 병립한 사실과 배달민족의 기원을 통해 한국역사의 시원이 중국의 그것과 마찬가지임을 밝혀 민족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11가지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하나씩 짚어나갔다. 또 한·중 두 나라가 일본으로부터 당한 수모를 기록한 뒤, 한·중 양국의 관혼상제와 근대정치를 비교하고 한말 일본공사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마지막 부분에서 한중 양국인의 결함과 세계에서 나라 잃은 국민의 결함을 썼다. 끝으로 결론에서 철저한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을 표명한 뒤, 양국의 인사들이 실패한 과거를 징계하고 장래에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생사일선(生死一線)에 선 같은 처지에서 서로 협조해야 한다고 매듭지었다.

선생은 양계초를 비롯한 중국 근대 유명학자들이 곧잘 범했던 역사 인식의 오류를 냉혹하게 지적하면서, 황염배가 일본인에 의해 저질러진 왜곡된 면모를 헤아리지 못한 채 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고 힐난하였다. 특히 고대 민족사의 영역만이 아니라 일제에 의해 주장된 신공황후에 대한 이야기 등을 비판하고, 특히 일제에 의해 조작된 만보산 사건까지 짚어 나갔다. 망명 시기 가운데서도 항주 거류시기는 정착시기가 아니었으므로 더욱 어렵던 무렵이었다. 때문에 그 시기에 작성된 이 책은 더욱 값진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비록 자금사정으로 인하여 많은 부수를 발간하지는 못해 아쉽지만, 중국인 지도자들에게 한국사를 제대로 살펴보라는 엄중한 꾸짖음 그 자체로서도 의미가 큰 책이 아닐 수 없다.

중경에 도착한 뒤 선생은 임시정부(政)와 한국독립당(黨)을 축으로 활동하였다. 먼저 임시정부에서는 1940년 이후 해방을 맞던 1945년까지 줄곧 국무위원이면서 의정원 의원으로서 활동하였는데, 특히 재무부장을 맡던 기간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주로 중국국민당 정부로부터 지원되는 자금으로 운영되는 처지였지만, 갈수록 그 규모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전시체제에 맞는 재원조달과 지출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 상황에서 임시정부의 재무부장을 맡은 것이다. 한편 선생은 의정원에서도 주로 재정분야를 담당하였다. 1942년 10월부터 선생은 의정원의 제3과(재정 예결산) 분과 위원을 맡아 역시 재정분야를 담당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선생의 정당 활동 노선은 김구와 거의 같은 것으로 정리된다. 상해 한국독립당을 발기하고 이사로 활동한 이후, 남경 시절 한국국민당(1935)으로 연결되고, 다시 중경에 도착하면서 한국독립당(중경)으로 이어졌다. 중경시절의 한국독립당은 1940년 5월에 열린 우파 3당(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재건 한국독립당)의 통합체였다. 이 정당에서 선생은 주로 감찰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즉 중경에서 통합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자마자 선생이 감찰위원으로 선임되었고, 다시 1942년에 한국독립당이 중앙집행위원제로 변경되자 김구가 중앙집행위원장이 되고, 선생은 감찰위원장을 맡았던 것이다.

한편 선생은 중국국민당 정부와의 외교문화활동에도 참가하였다. 중경에서 조직된 최고의 양국 우호단체가 한중문화협회인데, 1942년 10월 11일에 중경방송빌딩에서 창립되었다.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참가하였는데, 이시영·김규식·조완구·조소앙·박찬익·최동오 등과 중국의 손과(孫科)·우우임(于右任)·오철성(吳鐵城)·곽말약(郭沫若) 등이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중경시절 선생이 남긴 글에는 중경판 《독립신문(獨立新聞)》에 기고한 것이 있다. 1944년 8월 29일자 《독립신문》(제3호)에 시림산인(始林山人)이란 필명으로 게재된 <담망국노얼(談亡國奴孼)>가 그것이다. 선생은 망국 당시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송병준·이용구 등 망국 원흉들의 매국행적을 기록하고, 후손들에게 참고가 될 것 같다면서 1910년 8월 22일에 기초되고 8월 29일에 선포된 이른바 <한일합병조약>을 제시했다.


한국독립당 제1차 중앙집감위원 사진(1940.5.16), 아랫줄 왼쪽에서 다섯번째가 이시영 선생

광복 맞아 드디어 환국…
대륙에서 풍찬노숙하다 일제에 숨져간 형제들 회상하며 뜨거운 눈물…

해방을 맞아 중경을 출발한 선생은 상해를 거쳐 1945년 11월 23일에 임시정부 요인 제1진의 한 사람으로 환국하였다. 이시영 선생의 바로 위인 넷째 형 이회영은 아나키스트가 되어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옥중에서 순국했다. 다른 네 형제도 중국 전역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 세상을 떠났다. 만주로 떠났던 6형제 중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온 이는 이시영 선생 혼자였다. 환국 시기에 칠순의 이시영 선생은 세상을 떠난 형제들을 생각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곤 했다.

고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선생은 세 가지 일에 힘을 쏟았다. 하나는 정치활동으로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위원장으로 활약한 것이다. 둘째는 종교활동으로서 성균관총재를 맡은 것과 대종교(大倧敎) 활동에 진력한 것인데, 특히 대종교의 사교교질(司敎敎秩)·원로원장·사교(司敎)·도형(道兄) 등의 주요직책을 역임하였다. 셋째로 선생은 교육운동에 앞장섰다. 환국 직후부터 신흥무관학교 부활위원회를 조직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건학이념 계승과 인재양성에 착수하였으니, 그 결과 1947년 2월 재단법인 성재학원(省齋學園)을 설립하고, 신흥전문학관(新興專門學館)으로 발전시켜 1·2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렇지만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일시 침체국면에 처하기도 하였으며, 그것이 오늘날의 경희대학교로 계승되었다.귀국한 지 2년 가까이 지나면서 선생은 정치적 변신을 도모하였다. 우선 1947년 9월 공직사퇴 성명을 발표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직을 사퇴하였다. 그리고 한 해 뒤인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실시된 정·부통령선거에서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부산이 전시수도이던 시절인 1951년 5월 9일 국회에 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국정혼란과 사회부패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요지의 <대국민성명서>를 발표하고 정부를 떠났다. 그리고 다음해인 1952년 8월 5일 시행된 제2대 대통령선거 때에는 야당인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대한민국 초대 각료들의 사진과 약력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이범석 등의 사진과 약력이 실려 있다.

모든 가산 항일전선에 바치고 나이 칠십에 임정 재정부장 맡았던 열정…
광복후 부통령으로 일해

선생은 한국 최고의 명가 출신이자, 어린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여 일찍 관직생활을 시작하고, 30대 나이에 이미 평남 관찰사를 역임하는 등 중요 직책을 거친 엘리트였다. 어느 하나 남부러울 것이 없던 선생이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생사를 알 수 없는 만주로 망명한 것이 1910년이니, 선생의 나이 40대였다. 그곳에서 선생은 만주에서 독립전쟁을 위한 기지를 건설하고 인력을 양성하였다. 50대에 들던 1919년부터 북경을 거쳐 상해에 도착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참여하고 이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그러다가 60대에 들어서는 임시정부를 이끌고 기나긴 고난의 길을 나섰으며 정부를 지켜나가는 버팀목 구실을 해냈다. 선생이 중경에 도착한 뒤에는 주로 임시정부의 재무부장을 맡아 재정을 담당하였는데, 이 때가 선생의 나이 70대라는 고령이었다. 1910년 말에 망명하여 1945년 11월에 환국할 때까지 선생의 행적은 독립운동의 현장 바로 그곳이었다. 즉 일제강점기는 그대로 선생의 독립운동 시기였고, 선생의 발자취는 바로 독립운동 현장이었다. 선생은 독립운동 기간 동안 항상 목소리 낮추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자신의 자리를 지킨 인물이다. 또 격렬한 투쟁의 현장에 나서거나 좌우 분화와 갈등의 길목에서 조용히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선생은 1953년에 서거하였고, 장례는 9일간의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처음에 서울 정릉묘소에 안장되었다가, 1964년 수유리에 있는 묘소로 이장되었다.

정부는 민족을 위해 바친 선생의 뜻과 공을 기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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