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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이씨 역사 > 역대중요인물 > 이제현


가로 93㎝, 세로 177.3㎝로 의자에 앉은 모습을 비단에 채색하여 그렸다.
대부분의 초상화가 오른쪽을 바라보는데 비해 왼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안향의 반신상과 함께
현재 남아 있는 고려시대 초상화의 원본 2점 가운데 하나로, 국보 제 110호로 지정되었다.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1287년(충렬왕 13)에 출생하여 1367년(공민왕 16)까지 활동한 인물로 당시 고려사회를 대표하는 정치가이자 학자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이라는 고려 최고의 관직까지 올랐으며, 그가 남긴 수많은 글과 더불어 해박한 식견은 현재는 물론이고, 당시 사회에서 이미 존경받고 있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100여 년간에 걸친 무인(武人) 지배로 인한 후유증과 함께 원(元)의 정치적 간섭을 받던 시련의 시기였다. 이제현은 이러한 시기에 수차에 걸쳐서 원을 왕래하기도 하고, 표문(表文)을 올려 원의 부당한 내정간섭을 비판하면서 고려의 주권을 보전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 인물이라 평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시험을 통해 관직에 진출하다

고려후기를 대표하는 문신관료 이제현의 자는 중사(仲思)이며 처음에는 이름을 지공(之公)이라 했다가 뒤에 제현으로 개명하였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목은 이색이 쓴 이제현 묘지명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이진에 이르러 비로소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들어선 신흥사대부 집안이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는 벼슬길에 나가는 등용문이 과거(科擧)였지만, 고려시대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부친에 이어 과거시험을 통해 관로(官路)에 나갔다는 사실은 그의 출신이 문벌귀족이 아님을 말해준다. 이제현은 어려서부터 의젓하여 마치 어른 같았고 글을 잘 지어서 작가의 기풍을 가졌다고 전한다. 학계에서는 부친인 이진에 이르기까지 한 명도 중앙 관로에 진출하지 못한 것을 두고 무인집권기에 그의 가문이 크게 퇴락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의 자질은 일찍부터 두드러졌다. 1301년(충렬왕 27) 나이 15세로 성균(成均) 시험에 합격하였고 이어서 문과시험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이제현이 이른 나이에 합격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시험에 매달려 출세만을 염두에 둔 그런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과거시험이라는 것은 학문의 소소한 지엽(枝葉)에 불과하다.”하고 경서(經書) 공부에 더욱 열중하여 학문적 깊이를 갖추어 나갔다. 부친인 이진은 그러한 아들을 대견하게 생각하여 “하늘이 우리 가문을 더욱 번창시켜려나 보다.”라고 하였다. 이제현은 문과시험에 합격할 당시에 밀직사사 권영의 문하에 있었는데, 권영이 그의 학문과 뜻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딸과 혼인하게 하였다. 장인인 권영의 가문은 이제현의 집안과 비교해 볼 때 세력이 막강했다. 이러한 처가의 배경은 앞으로의 정치행로 및 학문에 큰 배경이 되었다.

충선왕이 사랑한 고려의 지식인

1301년을 기점으로 발을 디딘 이제현의 관로 생활은 화려했다.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을 거쳐 규정(糾正)으로 발탁된 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성균악정(成均樂正)이 되었다. 일찍이 풍저감두곡(?儲監斗斛)에 임명되었을 때, 두량(斗量)과 저울눈을 보는 데 전혀 서투르지 않아 다른 이들이 저마다 “정말 이공(李公)은 한계가 없는 사람 같다.”라고 하였다.

그의 관직 생활에서 하이라이트는 고려를 대표하여 원에 갔던 사행(使行)에 있다. 1313년(충선왕 5)에 당시 왕이었던 충선왕은 왕위를 충숙왕에게 전위하고는 연경(지금의 북경)으로 가 만권당(萬卷堂)이라 불리는 학술기관을 짓고 당시 원의 석학인 요수·염복·원명선·조맹부 등과 고전을 연구하며 교유하고 있었다. 충선왕은 세조 쿠빌라이의 외손자로 세자 시절부터 오랫동안 원나라에서 생활한 탓에 본국인 고려보다 원나라에 더 많은 지우들이 있었다. 충선왕은 본국의 이제현을 불러 원나라 거유(巨儒)들과 어울리게 하였다.

이제현이 연경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314년 충숙왕 원년 정월로 이때 그의 나이 불과 29세였다. 1316년(충숙왕 3) 4월에는 서촉(西蜀)에 사신으로 갔는데, 이때 아미산을 돌아보면서 많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충선왕은 이후 1319년 3월부터 몇 달 동안 이제현과 권한공 등을 데리고 절강 방면으로 함께 여행하였고, 이제현은 절강 지방과 보타산을 유람하면서 행록(行錄) 1권을 만들었다. 당시 충선왕은 이제현을 총애하여 원의 유명한 화가 진감여(익재집에는 오수산(吳壽山)이 그렸다고 전한다)를 불러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고 북촌 탕(湯)에게 찬을 쓰게 하였다. 이제현은 30여년이 지난 후 연경에 갔다가 이때 당시 그린 자신의 초상을 보았다고 한다.

이제현은 원에 체류하는 동안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적 깊이를 더하여 갔고, 또 유배된 충선왕을 수행하면서 견문을 넓혀 그의 학문적 안목은 더욱 정연되어 갔다. 이로써 그는 원에서도 존경받는 학자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고려에서는 부동의 학문적 위치를 확보하였다. 특히 1320년 6월에 시험 고시관인 지공거가 되어 33명의 과거급제자를 선발하였는데, 이때 과거에 합격한 인물들 중에는 최용갑을 비롯하여 이곡·백문보·안보 등 고려시대 정치 및 학계에 이름을 빛낸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 충숙왕은 그의 공을 치하하여 은병 50개와 쌀 100석을 하사하였고 이를 학사연(學士宴) 경비에 쓰게 했다. 학사연은 고려시대 과거 고시관이 자기 문하에서 합격한 자들을 불러 축하해주는 잔치를 말한다.

56년간의 다사다난했던 관로 생활

1320년 12월에 연경에 있던 충선왕이 참소를 받아 토번(吐藩)으로 유배를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고려출신 환관인 임백안독고사가 평소 충선왕을 미워하다가 황제 영종을 움직여 충선왕을 제거하려 한 것이다. 이후로 충선왕은 영종이 시해되고 태정제가 즉위한 1323년 9월까지 약 3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충선왕이 유폐된 토번은 연경과는 1만 5천리나 떨어진 벽지였다. 이제현은 최성지와 더불어 충선왕의 무고함과 귀국을 호소하였고, 충선왕을 알현하기 위해 험한 길을 건너 유배지를 찾아갔다. 당시 이제현은 황토점이라는 곳에 이르러 시 3편을 지어 자신의 울분을 표현했다.

충선왕이 토번에 유폐될 무렵, 유청신·오잠 등이 원에다 고려에 정동성을 설치하여 고려를 원의 속령으로 편입시키자는 내용의 글을 올리는 사건이 있었다. 이제현은 “나라를 그들의 나라 그대로 두고 백성들은 그들 나라의 백성으로 내버려 두십시오”라며 원을 설득하였다.

이제현의 표면적인 벼슬 생활은 화려했지만, 그 이면은 국익과 민생을 위해 봉사한 시기였다. 수차에 걸쳐 정치 개혁의 선봉에 서서 충목왕 즉위 초의 정치개혁, 공민왕 원년의 정치개혁, 공민왕 5년 및 12년의 정치개혁을 지지하고 이끌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문장과 시문에도 능통하여 당대 제일의 문한(文翰)으로 존경을 받았고, 당시 그가 지은 문장과 시는 오늘날까지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성리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 식견과 보급을 위한 노력은 조선시대 학자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어 ‘도학의 창도자’로 칭송받았다.

말년의 은둔생활

고려왕실을 지키기 위한 그의 노력은 충선왕을 이어 계속되었다. 1339년에 충숙왕이 죽자 조적(曹?)이 심왕(瀋王)과 결탁하여 난을 일으켰는데, 왕위에 오른 충혜왕이 정예기병을 거느리고 그를 죽이는 사건이 있었다. 이에 연경에 있는 부원세력(附元勢力)들이 충혜왕을 모함하여 급기야 원이 충혜왕을 소환하기에 이르렀다. 극단적인 일이 발생하자 모든 조정 대신과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이제현은 몸을 돌보지 않고 “나는 우리 왕의 신하일 뿐이다”라며 충혜왕을 호종하고 원에 가서 일을 무마시켰다. 이 일을 두고 충혜왕은 “산천이 변할지라도 그 공은 잊을 수 없다”며 감격해 했다. 그러나 조정에는 부원세력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더 이상 뜻을 펼칠 수 없음을 느낀 이제현은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했다. 그의 저작으로 유명한 [역옹패설?翁稗說]은 이 시기에 쓰여진 것이다.

이제현의 공식적인 은퇴시기는 공민왕대이다. 1357년(공민왕 6) 당시 그는 늙은 몸으로 녹봉을 많이 받는 것은 의리에 어긋난다며 물러나기를 요청했다. 공민왕은 그를 공경하여 계림부원군으로 봉하여 예를 갖추었다.

이제현이 공민왕이 총애한 신돈을 비판한 것은 유명하다. 공민왕이 신돈을 중용하자 이제현은 “반드시 후환을 끼칠 자이니 가까이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하고 왕을 설득했다. 훗날 신돈이 실각하자 공민왕은 “익재의 선견지명은 따를 수가 없다. 일찍이 신돈은 마음이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 하더니, 지금 과연 증험(證驗)되었다.”고 감탄했다 한다. 공민왕은 이제현을 일컬어 이름을 부르지 않고 늘 ‘익재’라고 호칭했는데, 왕을 비롯하여 동료들이 감히 이제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반드시 익재라고 불렀다고 한다. 재상(宰相)이 되고나서는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익재라 블렀다. 익재(益齋)라는 호는 본인이 직접 지은 것이다.

1367년(공민왕 16)에 병으로 세상을 뜨니 향년 81세였다.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우봉현 도리촌 선영에 모셔졌다.

역옹패설의 집필과 이제현의 역사관

이제현이 살았던 시기에 고려 사람들은 사실 이중의 국가체제 속에 살았다. 예컨대 고려사람은 고려의 과거시험도 볼 수 있었고 원의 과거시험에도 응시할 수 있었다. 원나라 여행은 타국인이 아닌 국내인 자격으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중의 국가개념은 대등한 것이 아니었다. 고려와 원은 상하 관계로 형성되어 고려의 국가기구와 왕실은 격하되었고, 원제국의 부마국(駙馬國)으로서 직접 간접으로 원의 내정간섭을 받았다.

당시 이제현을 비롯한 지식인들은 원과 고려의 관계를 천자국과 제후국의 관계로 파악했다. 상하의 신분개념에 익숙한 당대인들은 두 국가간의 상하관계를 무리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1323년 원에서 고려왕조를 없애려 하자 이제현은 천자는 제후국을 존속시켜 줄 의미가 있음을 원칙으로 내세워 존속을 주장했다. 그는 장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는 역사적 신념이 있었고, 왕실의 안정과 민생문제에 누구보다 관심을 기울였던 인물이었다. 그는 정치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민생이 어려워진다고 생각했다. 백성의 수를 불린 후에 부유하게 하고 부유하게 한 뒤에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원의 경제적 침탈이나 내정간섭에 대해서는 두드러지게 반대하는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이제현은 1342년(충혜왕 3) 조적의 난으로 두문불출하고 있을 무렵에 [역옹패설]을 저술했다. 4권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역사적 사실의 기술과 함께 평론을 실은 책이다. 이 책이 쓰여진 충혜왕 대는 원 간섭기의 어떤 군주보다도 파행적으로 정치운영이 이루어졌다. 원 지배기를 온몸으로 경험한 노학자의 역사인식은 정치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서 출발했다. 그는 고려를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국내 정치와 경제에서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국가재정을 확립하고,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는 것을 가장 시급한 것으로 파악했다. 이러한 그의 시대의식은 당시 지식인으로는 가장 진보적인 생각이었고, 훗날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들의 시대의식과도 맞닿아 있다. 그의 시대의식이 담겨져있는 [역옹패설] [충헌왕세가忠憲王世家] [국사國史] [김공행군기金公行軍記] 등은 모두 당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는 왜 당대사만을 썼을까. 이는 역사서를 편찬한 목적이 다른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역사책을 쓴 것은 후대인들에게 교훈을 주려 한 것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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